로버트 실러 <비이성적 과열> 번영 뒤에 나타난 경제 버블 붕괴
로버트 실러는 미국의 경제학자로, 학계의 정론과 달리 시장은 근본적으로 비이성적이며 버블 형성과 붕괴로 점철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경제에 낙관적인 전망이 가득할 때 홀로 증시 폭락을 경고하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닷컴 버블과 미국 부동산 버블의 불괴를 예측한 바 있습니다. 2013년 시장의 효율성과 자산 가격을 결정하는 요인들에 대한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언제나 시장이 얼마나 효율적인지에 대해 열띠게 토론합니다. 시장이 효율적이라는 의미는 간단히 말해 시장이 똑똑하다는 말입니다. 증권 시장을 지켜보는 많은 투자자는 새로운 정보가 등장하는 즉시 이를 반영해 가격을 움직입니다. 또 개별 투자자들은 오류나 편향에 치우칠 수 있지만, 수많은 투자자가 서로의 편향을 상쇄하며 시장 전체는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가격을 움직이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시장이 효율적이라면 가격의 상승은 곧 가치의 성장을 의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증시가 경제 성장을 빠르게 앞지르거나 심지어 불경기에도 주식과 부동산이 끝없이 치솟는 것을 숱하게 목격해왔습니다. 이런 광풍과 붕괴는 성공한 투자자가 되고 싶은 개인들에게 투자 판단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입니다. 특히 경기 전반을 감독, 조정해야 하는 위정자들에게는 더욱 골치 아픈 문제이기도 합니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버블 현상은 붕괴뿐 아니라 형성이 될 때도 부정적인 파급 효과를 발생합니다. 한 영역의 상승장에 대한 낙관이 과도할 경우, 여기로 모든 자금이 쏠리며 투자가 정말 필요한 다른 산업이나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침체됩니다. 그 결과 증시는 올라도 사회의 근본적인 생산성은 하락하고, 이에 맞물려 버블이 붕괴하는 것입니다. 버블 붕괴의 악영향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증시의 갑작스러운 폭락은 경제의 자금줄을 말립니다. 이는 투자 손실에 그치지 않고 경제 위기까지 초래합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런 '비이성적인 과열'을 경계하고 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용어는 1996년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던 앨런 그린스펀이 처음 사용했는데, 이 용어가 사용되던 1990년대는 미래에 대한 낙관, '이번에는 예전과 다르다'는 인식으로 인해 IT 버블이 끓어오르던 시기였습니다. 1996년 12월, 그린스펀은 금융계 주요 석학들과 함께 시장 상황에 대한 회의를 열었습니다. 여기서 실러는 버블이 발생하는 이유와 과정을 설명하면서 현재 시장이 비이성적인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린스펀은 취임 첫해인 1987년, 하루에 주가가 22% 폭락한 '블랙 먼데이'를 경험한 바 있었습니다. 그가 호황 뒤에 가려진 붕괴를 인지하고 경계한 배경입니다. 회의 3일 뒤, 그린스펀은 공개 연설 중 "버블은 지나치게 증시를 끌어올리고, 뒤이어 폭락과 침체를 불러온다. 이 원인이 되는 비이성적 과열을 우리는 어떻게 감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연준 의장의 이례적인 호황 속 비관에 다음 날 세계 증시는 하락했습니다. 그러나 주춤한 것도 잠시, 증시는 다시 고공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2001년, 결국 닷컴 버블이 터지며 증시는 곤두박질쳤습니다. 그 직후 미국 부동산 시장이 '비이성적 과열'의 다음 주자가 되었고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이어졌습니다. 자꾸만 반복되는 버블 형성과 붕괴를 예견하고 사후가 아닌 사전에 감지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를 위해 실러는 왜 버블이 유래하는지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비이성적 과열>에 담았습니다.
실러는 버블이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인지를 밝히기 위해 시장 구조적, 문화적 그리고 심리적 배경들을 하나씩 분석합니다. <비이성적 과열>은 2000년에 출간됐습니다. 이때는 닷컴 버블이 터지기 전, 시장이 광풍과 낙관에 젖어 있던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너무나 예언적이라 마치 버블 붕괴 후에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짜맞춘 이야기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비이성적 과열>은 과거와 미래의 모든 버블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프레임워크를 제공합니다. 그중에서도 역시 시대적 배경에 맞게 닷컴 버블을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실러는 닷컴 버블의 연료가 된 투자자들의 낙관에 불을 지핀 여러 환경적 원인을 지적합니다. 1990년대 미국 경제는 인터넷의 잠재성에 대한 기대감으로 새로운 세상, 새로운 경제가 열릴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라이벌 국가들은 장기 침체를 겪었고, 미국만이 홀로 돋보이는 시기였습니다. 또 공화당 의회가 입안한 투자소득세 감세 혜택을 받기 위해 투자자들은 매도를 미뤘고, 베이비부머 세대의 경제 활동이 정점에 달하며 매수세는 극에 달했습니다. 사실 1990년대와 같은 호황세와 장밋빛 미래에 대한 기대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당대의 낙관은 마치 1920년대 세계 대공황 직전의 황금기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의 스태그플레이션 직전의 밝은 전망과도 닮았습니다.미래를 내다보지는 못하더라도, 과거를 조금이나마 공부한 사람이라면 으스스한 데자뷰를 감지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비이성적 과열이 마치 전염병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확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거시 경제적 요인뿐 아니라 심리적 요소에도 강한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은 본래 사회적인 동물로,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견에 강한 영향을 받습니다. 버블은 사람들이 공통적인 의견을 공유할 때 증폭됩니다. 서로가 서로의 메아리가 되어 낙관에 대한 더 강한 확신을 품게 하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의 의견을 모으는 것이 바로 미디어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모여 여론을 형성하고, 여론이 다시 사람들의 의견을 획일화하면서 버블을 키우는 것입니다. 역사를 뒤돌아보는 입장에서 이런 군중 심리는 어리석어 보일 수 있지만, 버블의 한 가운데에 있는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실러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버블의 악영향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증시가 20% 떨어졌다고 해서 일자리가 20% 사라졌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즉, 투자 손실이 실물 경제에 정말로 피해를 입히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버블 붕괴가 가져오는 사회적 파급 효과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버블이 붕괴될 때마다 수천, 수만의 사람이 평생 모은 은퇴 자금을 잃고 노인 빈곤층으로 전락하거나, 빚더미를 떠안으며 세워놓은 삶의 계획이 완전히 무너지곤 합니다. 엄청난 가격 변동에 누군가는 천문학적인 이익을 올리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거리에 나앉는 극단적인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실러는 사람들에게 폭락에 대비한 보수적인 투자, 합리적인 투자를 강하게 권고합니다. 시장 상황의 급격한 반전을 불러올 수 있는 요소들을 미리 예측하기란 쉽지 않기에 개인들은 위험을 줄이는 방향으로 자산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실러가 개인 투자자들에게 내린 처방은 정작 그가 강하게 비판했던, "시장은 효율적"이라고 했던 이들의 제안과 닮아 있습니다. 주식과 같은 고위험 자산의 비중을 줄이고, 다양한 자산에 골고루 나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실러는 <비이성적 과열>에서 시장이 효율적, 합리적이라는 학계의 정설에 반박합니다. 이는 곧 많은 경제학자 사이에서 열띤 토론을 촉발했습니다. 재미있게도 실러와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은 2013년 노벨경제학상을 공통 수상한 유진 파마 교수입니다. 그는 시장이 효율적이기에 정부의 개입과 규제가 불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실러가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연구 대신 사후에 인과관계를 그럴듯하게 엮어 만드는 스토리텔링에 의존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비판은 학계에서 어떻게 학문적 발견이 이루어지는지를 알면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지난 100년간 경제학이 철학과 정치사회학에서 독립된 이래로 경제학자들은 과학적 연구 방법론을 도입하려고 애써왔습니다. 타고난 이야기꾼이 아닌, 물리학자와 수학자처럼 검증하고 그 위에 또 다른 연구를 축적하며 세상을 설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파마와 같은 학자들이 리를 중요시하는 분파에 속합니다. 이 효율적인 시장 가설의 지지자들은 과학자들이 으레 그렇듯, 가설을 설정하고 이를 실험하여 지식을 축적하고 싶어 합니다. 사회 현상을 실험실에서 재현할 수는 없기에 경제학자들은 실험 대신 과거의 데이터를 통해 실증적 분석에 의존합니다. 문제는 지금까지 경제학 연구에서는 이런 실증적 분석을 통해 버블의 전조를 짚어낼 지표를 찾아낸 바 없다는 것입니다. 파마가 실러에게 제기하는 비판이 이것입니다. 그렇게 버블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고, 왜 버블이 생겨나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항상 붕괴 이후에야 그 존재를 깨닫는 것일까요? 버블이 존재한다면 이를 입증하고, 더 나아가 예측할 수 있는 지표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실러는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여 현재 시장 전반의 가격 수준이 얼마나 고점인지 파악할 수 있는 몇 가지 계량적 지표를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통계적 기법과 거시 경제 데이터를 조합하여 만든 경기조정주가수익률 즉, '실러 PER'와, 마찬가지로 여러 데이터를 조합하여 만든 주택시장가격지수인 '케이스-실러 주택가격지수'가 그것입니다. 이 지표의 신뢰성에 관해서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전 세계의 많은 투자자와 위정자들은 이를 중요한 지표로 참고하고 있습니다. 실러는 학계 정론에 정면으로 충돌하면서도 결코 '버블은 존재하며, 나는 이를 예측할 수 있다'는 오만한 주장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버블 한가운데에서 시장의 향방을 개인이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도 효율적 시장 가설의 지지자들처럼 과학적 연구 방법론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는 학문적 엄밀함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현실 세계에 더 충실한 학자이고 싶었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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